본문 바로가기
언젠가 눌러앉기/2004-2006, Japan

절교선언

by 하와이안걸 2006. 1. 8.

1월 8일 일요일. 저녁근무.


오늘 낮에 있던 일이다. 아이란도에 배치를 받았으나 사원이 너무 많아서 설 자리도 없었다.
다른데 도와줄데 없나 둘러보던 중, 센베코너에 사람이 확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이럴 때 안도와주면 또 잔소리 듣겠다싶어 잽싸게 날아갔으나 하필이면 시식만 와구와구 먹고
우루루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아메미야 언니가 말을 걸었다.

"나 여기 청소하는 척 좀 할테니 그냥 더 있다가. 돌아가봤자 거긴 자리도 없는데..."

언니의 묵직한 마음에 또 감동받아서 맘편한 센베코너에서 소일거리를 찾았다. 그런데...
다카하시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말을 걸었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이상 지금 뭐하죠?"
"네?"
"이상 오늘 어디죠?"
"아이란도인데요."
"근데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죠?"
"잠시 붐벼서 도와주러 왔는데요?"
"근데 왜 안돌아가고?"
"아메미야상 청소끝날때까지만 있으려구요. 지금 갈까요?"

아이란도를 휙 둘러보는 다카하시. 그러나 파리만 날리고 파견사원만 드글대는 아이란도.

"잠깐만요. 이상이 할일을 만들어올테니 여기서 기다려요."

아, 재수없어;;; 저게 또 초장부터 난리야.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못 들은척 비질을 하던 아메언니가 허리를 펴고 날 보더니 피식 웃었다.

"오늘 꽤나 시끄럽군. 조심하자."

사무실 문을 쾅 닫고 나온 다카하시는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이상 컴퓨터 잘해?"
"네." (단축키도 모르는 너네보다는)
"그럼 이 표 좀 엑셀로 다시 만들어줄래? 이상이라면 왠지 할 수 있을거 같아서."
"네."

6등분으로 나뉘어진 표에 점선으로 된 빈칸. 칸마다 날짜 적는 란이 적혀있었다.
매일 조례 때 읽는 연락장 같은건데 손으로 그려서 수십년째 복사해서 쓰는 것 같았다. 촌시련 것들;;
엑셀 다 까먹었는데 수식들어간 어려운거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이런 껌같은 파일이라니...
5분만(사실 5분도 길다;;)에 완성해서 내밀었더니 "우와 빠르다~" 하면서 존경의 눈으로 날 보았다.
자랑스러워 하기도 약간 쪽팔렸다. '어머. 얘네 왜들이래-_-;' 이런 표정으로 후다닥 사무실을 떴다. 


그나저나 다카하시의 그 표정. 안그래도 크리스마스다 연말이다 카드며, 메일을 보내는 통에
얘가 또 왜 이렇게 사람 헷갈리게 하나 싶었는데 역시나 이 아이는 봐주면 안되는 아이였다.
다른 사람들 말처럼 정말 올해 지가 한국에 가기때문에 갑자기 친절한 척을 하는걸까? 하며
잠시 씁쓸해했던 기억이 있었다. 아니길 바라며. 그러나 오늘의 행동을 보며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 그냥 이렇게 계속 싸가지 없게 나가라. 차라리 그래야 내 맘이 더 편하다...


긴 하루가 지나고 집에 돌아갔다. 티비를 보면서 김짱과 다카하시를 씹었다.
김짱도 역시 의견은 같았다. "잘됐네. 그냥 무시해. 한국가서 부담도 없고 좋네 뭐..."
역시 그런거지? 그런데... 갑자기 열두시 넘자마자 울리는 핸드폰 메일.... 그녀로부터....



'언니~ 늦은 시간에 미안. 오늘 꽤 오랜만에 함께 일한거지?
그런데 언니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왠지 기운이 없어보이던데...
고민있어? 비자 때문에 그런거야? 아직도 심사중?
겨우 공항일에 적응했는데 오래오래 일했으면 좋겠어. 
어려운 일 있으면 뭐든지 말하구.'


갑자기 머리가 아득했다. 이건 최악의 상황이다.
그냥 씹으라는 김짱의 충고. 그러나 어쩌면 하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비자 결과는 아직 안나왔지만 아마도 힘들것 같다. 그만둘 준비를 해야겠지.
그리고 오늘 기운이 없어 보였던건 아마도 너에게 한소리 듣고나서부터 일거야.
솔직히 말해서 난 다른 사원들보다도 너에게 잔소리를 들을 때가 가장 속상하다.
일할 때의 너의 말투나 표정도 점점 감당하기 힘들고.
그래도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하니까 이해하려고,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그리고 이 일만 그만두면, 한국에서 너를 다시 만나면, 안 좋은 기억 다 잊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구나. 자신이 없다.
지금 너의 메일 받고 너무 놀랬다. 어느 쪽이 진짜 너의 모습인지 모르겠어.

이제부터는 일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별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 될지도.
나야말로 늦은 시간에 미안해.'



송신완료. 메일 수신음을 무음;으로 바꾸고 나는 잠을 청했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잤다. 내일이 두렵지만 두렵지 않다.







이젠 정말 끝.

'언젠가 눌러앉기 > 2004-2006, Jap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년의 날, 어른의 의미  (3) 2006.01.09
절교선언  (3) 2006.01.08
휴일 보내기  (2) 2006.01.07
딸기모찌의 기억  (3) 2006.01.06
온수풀에서의 첫날  (2) 2005.12.22
토모미가 돌아왔다!!!  (5) 2005.12.21

댓글3